조선 후기의 문신인이돈우의 시문집이다. 아버지는 이수응(李秀應),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생원 권의도(權義度)의 딸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남다른 재질과 기골이 빼어났는데, 하루는 증숙조(曾叔祖)인 면암(俛庵) 이우(李禹)가 손금을보고는 “이 아이는 반드시 문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다.”라고하였다. 10세 때 『소학(小學)』을 배우고, 12세 때 『대학(大學)』을 배웠으며, 14세 때 『맹자』를 통독하는 등 사대부 집안의 교육과정을차근차근 밟아갔다. 24세 때 정시 대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이듬해 할아버지 의 명으로 정재 류치명의문하에 들어갔다. 30세 때 소암(小庵) 이석균(李鉐均)을 배알하러한양으로 가서 스승을 공경히 삼가면서 교유하였으며 먼지가 일고 어지러운 도성에 거처하 면서 유자(儒者)의 고아한 본색을 잃지 않아 지우(知友)들이 모두 공경하고 각별하게 생각하 였다. 41세 때 고산서원(高山書院)에서 『대산선생실기(大山先生實紀)』 간행을 감독하였다. 44세 때인1850(철종 1)년 2월 증광시에 급제하여 5월에 가주서가 되었고 8월 권지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48세에는 『주자연보(朱子年譜)』를 가려 뽑았고 『가학집요(家學輯要)』를 편찬하였다. 이듬해에는류치명을 배알하러 유배지인 지도 (智島)를 방문하였다. 50세 때 봄 호계서원(虎溪書院)에서강회를 베풀었다. 52세 때 류치명 에게 올리는 편지에서 『중용(中庸)』 27장의 의심난 부분을 논하기도 하였다. 55세 때 행홍 문관부교리지제교겸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에 제수되었다. 75세때 성재 허전에게 대산 이상정의 시장(諡狀)을 청하였으며, 이듬해 1864(고종 1)년사헌부지평과 사간원에 제수되었 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63세 때 사복시정에 제수되고 이어서 춘추관을겸하여 태백산에 들어가 사각(史閣)을 감수하였으며 곧 사헌부집의에제수되었다. 그 후에도 남학교수(南學敎 授), 형조참의,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거쳐 76세 때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이돈우는 후학 양성에도 관심을 가져 73세 때는 고산서당, 74세 때는 고운사(孤雲寺), 75세 때는 임천(臨川) 등 여러 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75세 때 용담사(龍潭寺)에서 『정재집(定齋集)』 간행을 지켜보았다. 이듬해 구담서당(龜潭書堂)에서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강론하였으며 여름에 병이 나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 문집은 1934년 이완복(李完馥)이편집, 간행하였다. 이 가운데 시에는 만시(輓詩)가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술회십칠운(述懷十七韻)」은 소서(小序)에서 자신이 평생 공령 (功令)의 글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고 하여 문장사화(文章詞華)에 관심이 없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 시 역시 문학적 흥감보다는우주와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변을 읊은 설리시 (說理詩)로되어 있다. 소(疏)의「응지진삼강구목소(應旨陳三綱九目疏)」는 1877(고종 14)년 임금의 명에 응하여 지은 것으로, 체천(體天)․순천(順天)․외천(畏天)을 3강령으로 하여입지 (立志)․거경(居敬)․납간(納謙)은 체천으로, 휼민(恤民)․회공(恢公)․상검(尙儉)은 순천으로, 입강(立綱)․척사(斥邪)․흥학(興學)은 외천으로 분류하여,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장편의 소이다. 서(書)에는 스승 류치명을 비롯하여 동문 이진상, 이수일 (李壽一), 김흥락등 주로 영남학파에 속한 많은 학자들과 문목(問目)․별지(別紙)로 학문적인 내용을 문답한 것이 많다. 잡저 역시 성리학과 예설 등에관한 논설들이 많다.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대개 사설(師說)을 따라 주리적(主理的)인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특히 「이기무한량설(理氣無限量說)」은 새로운 시각으로 이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잡저에는이밖에도 「경이직내설(敬以直內說)」․「존양함양변(存養涵養辨)」 등 수신(修身)에 관한것을 비롯하여 경의 해석에 관한 논변의 글이 상당수 있다. 전(傳)에는 이보흠(李甫欽)의전기가 있는데, 이보흠이 순흥부사로서 그곳에 유배되어 있는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교살 당한 사실이 소상하게쓰여 있다. 그 가운데 흥미 있는 내용으로는 순흥의 은행나무 한 그루가 고사(桔死)한 지 1백여 년이되었으나 이보흠이 그 고을에 부사로 부임해오자 고목에 새 잎이 돋아 울창해졌다가 이보흠이 처형당하자 갑자기 잎이 말라 떨어 졌고, 그 뒤 단종이 복위되면서 이보흠도 신원 되자 전과 같이 다시 고목의 잎이 울창해졌다는 기록이 있어 흥미롭다.